진로정보 | [미래톡톡] “인문학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나중까지 존재할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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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19-06-04 16:00 조회1,713회 댓글0건본문
▶톡톡 상담: 톡톡 상담: 안녕하세요. 중2 딸아이를 두고 있는 엄마입니다. 저희 딸은 어렸을 적부터 어문계열을 사랑한 순수 문과희망 청소년입니다. 그런데 요즘엔 ‘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문송’이라는 말 때문인지, 문과를 졸업하면 왠지 취업도 힘들고,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잘 편승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제가 말려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정말 문과를 졸업하면 그렇게 힘든가요? 주변을 살펴보면 문과 졸업생들도 취업을 곧 잘 하는 것 같은데 뉴스나 SNS를 보면 문과에는 미래가 없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특히 인공지능이 나오면서 외국어 능력이 쓸모없다고 하는데 현재 외국어를 전공하시는 분들은 어떤 비전을 갖고 있는지 너무 궁금합니다. 선배님들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톡톡 답변: 안녕하세요? 사랑하는 딸의 미래를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져 섣불리 답을 하지 못하고 생각이 많았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오랫동안 곁에서 묵묵히 지켜보시며 따님을 응원하고 지지해 오셨을 줄 압니다. 따님의 꿈을 지켜주고 싶지만 원하는 길을 가도록 지지하는 일이 오히려 앞날의 어려움이 될까 걱정하시는 마음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제 주변의 분들도 대부분 자녀분들이 ‘너무 힘들지 않게’ 살아가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런데 ‘너무 힘들지 않은 삶’이라는 건 어떤 삶일까요? 몸이 고단하지 않은 삶일까요? 아니면 마음이 고달프지 않은 삶일까요? 물론 그 가운데 꼭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몸도 고단하지 않고 마음도 고달프지 않게 살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테지요. 하지만 어머니도 아시는 것처럼, 그런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도 그에 필요한 노력을 들이지 않고는 성공하기 어려운 법이니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마음의 고달픔보다는 몸의 고단함이 조금은 더 견디기 낫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스스로 가치를 느끼지 못 하는 일을 하면서 몸이 편할 때보다는, 많이 수고롭고 버겁더라도 자신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해낼 때 더 큰 만족과 행복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누구나 자신에게 가치와 의미가 있는 일을 할 때 비로소 참된 행복을 느끼는 게 아닐까요? 따님이 어려서부터 변함없이 어문계열을 사랑하고 문과를 희망해 왔다면, 틀림없이 그 안에서 자기만의 가치와 의미를 찾았을 것입니다. 그런 가치와 의미를 포기하게 되는 것만큼 괴롭고 슬픈 일은 없겠지요. 그러니 지금까지 어머님은 딸을 위해 정말 큰일을 해 오신 것입니다. 자신이 믿는 가치와 의미를, 가족이나 친구처럼 가까운 사람들이 응원하고 지지해주는 것만큼 힘이 되는 일은 또 없으니까요.
말씀하신 대로 저 역시 요즘 ‘문송합니다’라는 말을 자주 듣고 있습니다. 인문학 전공자로서, 학교에서 인문학을 강의하는 선생으로서,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저는 정말 부끄러워 어디론가 숨고만 싶었습니다. 인문학은 사람의 경험과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학문입니다. 또한 인간 자신과 그를 둘러싼 세계의 조건을 고민하는 학문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보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학문인 셈입니다. 그런데 그런 학문을 전공하는 일이 어떻게 ‘죄스럽고 송구한’ 일이 될 수 있을까요? 만약 그런 사회가 있다면 그 사회는 ‘보다 사람답게 살기 위한’ 노력을 멈춘 사회일 것입니다. 정작 사과를 해야 할 쪽은 문과생이 아니라, 그런 환경을 만든 이 사회인 셈입니다. 인문학은 언어와 문자만을 다루는 학문이 아닙니다. 언어와 문자가 담고 있는 의미와 가치, 인간에 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학문입니다. 그러니 인류가 존재하는 한 그 학문의 의미와 가치도 완전히 소멸될 수 없지요.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해서 현존하는 많은 직업들이 사라질 거라고 합니다. 지금도 문과생들의 졸업 이후 진로가 막막한데,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면 더 막막해지지 않을까 걱정하시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말씀하신 것처럼 통역이나 번역과 관련된 일들은 인공지능이 대신하게 될 거라는 예측도 있습니다. 어머님의 가장 큰 걱정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실 인공지능의 작업은 대량의 데이터를 처리하는 일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이므로 정확한 관측은 힘들겠지만, 인공지능은 단순 노동이나 데이터를 분류하는 실질적인 업무에서 가장 먼저 우리를 대신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일을 진행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향은 인간의 판단에 따를 겁니다. 그리고 그 판단은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하겠지요. ‘사람’을 위한 판단의 가장 기본적인 근거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야말로 ‘인문학’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인문학은 오늘날과 같은 형태가 아닐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문과 전공자라고 할지라도 코딩이나 인공지능과 같은 과학적인 정보와 지식들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할 겁니다. 기본적인 이해는 필수적이고, 어느 정도 깊이 있는 이해가 있어야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겠지요. 그것이 바로 우리 세대, 나아가 미래의 인간을 둘러싼 세계 조건이기 때문이지요. 원론적인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지만, 인문학이 인간과 그를 둘러싼 세계 조건에 대한 고민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인류라는 생명체가 존재하는 한, 인문학은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돌아가는 길이 지름길이라는 말이 있지요. 급한 마음으로 들여다보면 인문학은 틀림없이 ‘돌아가는 길’입니다. 하지만 각도를 달리해서 본다면 그 길이야말로 이 지구상에 인류가 존재하는 한, 어느 시간, 어느 공간에서도 활용될 수밖에 없는 길, 맨 처음부터 있었고, 맨 나중까지 있을 길입니다. 최대한 어머님의 입장에서 고민을 거듭한 끝에 도달한 제 결론은 이렇습니다.
저는 어머님께서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묵묵히 따님의 뒤를 지키며 응원하고 지지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나중에라도 힘들어 할 때가 있다면, 그래서 자신의 오래된 결정을 후회하거나 후회하지는 않더라도 지쳐서 주저앉고 싶을 때, 그때 많이 안아주고 다시 일어나 걸어갈 수 있도록 기댈 언덕이 되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머님만이 할 수 있는 그런 일을 해 주시면 좋겠어요. 부족한 답변이지만 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글쓴이] 문현선(이화여자대학교 동시통역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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