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로정보 | [자기주도진로] “아프리카 전문가? 지리 공부와 답사는 삶 그 자체”
페이지 정보
최고관리자 작성일19-05-03 15:59 조회1,907회 댓글0건본문
택시기사였던 아버지는 쉬는 날이면 아내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어김없이 캠핑이나 당일치기 여행을 떠났다. 그럴 때마다 이웃들은 ‘또 놀러 다니냐’고 혀를 찰 정도로 부모님은 여행마니아였다. 아들은 수많은 여행지에서 부모님과 함께 경험들이 머리와 가슴에 깊이 새겼다. 학생 땐 여행지의 기억과 관련 깊은 국사나 한국지리 등 사회 과목을 유독 좋아했다. 초등학생 때는 뜻도 모르면서 삼국유사나 조선왕조실록, 택리지 같은 책을 읽기도 했고, 남이 쓰다 버린 지리부도나 여행지에서 받은 관광 지도를 모으는 것이 취미였다.
2013년 군 복무 후 복학 전에 동부 아프리카의 케냐를 처음 방문했던 그날 이후 2016년까지 세 차례 동남부 아프리카 11개국을 다녀온 경험을 바탕으로 《동남부 아프리카-손휘주의 지리 포토 에세이》(2018년 4월, 푸른길)를 펴낸 ‘지리 덕후’ 손휘주 씨(28)는 7월 현재도 아프리카 어느 나라, 어느 마을을 유랑 중이다. 8월 초에야 귀국한다는 휘주 씨를 이메일로 만나보았다.
■ 지리학은 세상에 관한 호기심을 해결할 수 있는 ‘문’
“지도와 지명 같은 지역 정보에 관심이 많았어요. 어린 시절의 여행경험과 다양한 지리 정보가 제 속에서 겹쳐지면서 자연스레 지리과목을 좋아하게 됐죠. 지리를 통해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인 ‘사회’를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 수능시험을 준비할 때도 지리 과목을 특히 열심히 공부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린 시절의 휘주 씨는 달리기, 글짓기, 만들기, 그리기 등 뭐든 좋아하는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의 아이였다. 휘주 씨의 초등학교 시절 꿈은 ‘지리학자’였다. 사실 당시엔 그런 직업이 있는지조차 몰랐지만 좋아했던 ‘지리’라는 단어에 전문가 느낌을 주는 ‘학자’라는 말을 붙인 것이다. 건국대 지리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인 휘주 씨에게 지리를 전공하게 된 특별한 계기는 이렇듯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확고했다. 하지만 전공 선택 당시 취업을 걱정하시던 부모님과 갈등을 겪은 적도 있었다.
“지리학과 나와선 취업이 힘들다고 하셔서 영문학과를 가겠다고 했어요. 세계 공용어인 영어를 하면 세계를 여행하기에 좋겠다고 생각했었고 부모님도 동의하셨지요. 하지만 하루 만에 결정을 바꿨습니다. 영어를 쓰지 않는 수많은 나라는 어떻게 다닐 것인지 생각해보니, 특정 언어보다는 지리학을 전공하는 것이 지구와 세상을 알아가는 데 더 좋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경북 경주에서 태어나 대전에서 고교시절을 보낸 휘주 씨는 건국대 지리학과에 입학했다. 지리학도로서의 대학생활은 만족 그 이상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그 좋아하는 여행을 한 번도 못 갔으니 몸이 근질근질했기도 했고, 지방 출신의 대학생이라 서울 지리조차 생소했기에 주말마다 서울이나 서울근교 여행을 다녔던 것이다. 그야말로 대학시절엔 원 없이 국내여행을 하면서 지리공부를 했었다.
■ 아프리카 첫 여행지 케냐에서 내가 해야 할 일 찾았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을 앞둔 때였어요. 불쑥 떠나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때 정한 여행지가 바로 아프리카 케냐였습니다. 당시에는 남은 20대를 어떤 일을 하며 보낼지 아무런 계획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봉사활동과 답사를 하며 케냐에서 3개월을 지내는 동안 지리학도로서 제가 해야 할 일이 눈에 보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프리카에 대해 부정적 시각, 즉 편견을 갖고 있다고 느꼈고, 그것이야말로 지리학도인 휘주 씨가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리학도의 관점에서 아프리카의 진짜 모습을 사진과 글로 전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첫 답사 당시에도 그랬고 5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듯,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자 가장 잘 하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굳이 왜 아프리카냐’라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유럽이나 동남아시아 등 지구상의 다른 지역들도 지리답사를 하기 좋은 곳은 셀 수 없이 많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지구의 모든 곳은 지리학의 연구 지역이 될 수 있지요. 그래서 아프리카의 지리가 가장 흥미롭다고는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아프리카의 경우 지속적으로 답사를 다니는 사람이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등 다른 대륙에 비해 적은 것이 사실이고 그만큼 정보도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아프리카의 이야기를 제대로 잘 전해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입니다.”
휘주 씨가 아프리카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다른 대륙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그곳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려면 게스트하우스나 술집이 아니면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저는 여행자일 뿐이므로 분리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치 요즘 서울의 아파트에서 옆집이나 윗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제가 경험했던 동남부 아프리카에서는 그곳 사람들과 부딪히고 질문하고 대화하고 같이 걸을 일이 많았습니다. 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거나 버스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 도미토리(dormitory:공동 침실) 룸에서 만난 아프리카 사람들, 오솔길에서 함께 손을 잡고 걸었던 아이들과의 만남은 유럽이나 동남아시아에서의 경험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확실히 아프리카에서 휘주 씨는 대화를 많이 했고 웃거나 싸우면서 그들과 정이 들어 때로는 그 사회의 일부가 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프리카에서의 경험이 소중했던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아프리카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고 느끼게 된 것이다. 2013년 동부 아프리카 1개국(약 3개월), 2015년 남부 아프리카 6개국(약 40일), 두 번의 답사를 통해 자신감을 얻었던 휘주 씨는 세 번째 답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큰 결심을 하게 된다.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아프리카 관련 책을 출판하겠다는 것이다.
“아프리카 여행 중에 온라인으로 작업하는 환경도 어려웠고, SNS나 블로그로는 동남부 아프리카의 지리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책 출판을 계획했습니다. 직접 느끼고 경험한 것, 현지 사람들로부터 들은 것, 아프리카 지역 연구자나 지역 활동가들의 기록을 통해 배운 것 등을 바탕으로 깊이 있는 동남부 아프리카 지리책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많은 이들의 응원에 힘입어 2016년 약 80일간 동남부 아프리카 7개국을 유랑하는 세 번째 답사를 떠났지만 결과적으로 책 출판은 하지 못했다. 이유는 휘주 씨가 크라우드펀딩을 위해 올린 기획안을 충족시키기엔 역부족인 답사내용 때문이었다. 단순한 여행 기록이 아닌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동남부 아프리카의 다양한 지리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약속했지만 스스로조차 기대했던 정도의 깊이 있는 유랑을 해내지 못했던 것이다.
“기획할 땐 첫 번째 유랑지였던 케냐에서의 3개월을 떠올리며 특정 지역에 관한 지식이나 이해도의 깊이가 그 정도면 되겠다고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3개월간 1개 국가를 경험하는 것과 (크라우드펀딩에서 계획했던) 5개월간 11개국을 경험하는 것은 지식이나 이해도 면에서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유명한 관광지를 둘러보고 현지 사람들을 스쳐 지나가는 일반적인 관광객이 아닌, 지리학도로서 특정 국가나 도시를 조금은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큰 부담을 갖고 시작한 세 번째 답사는 결국 3개월간의 일정만 마치고 돌아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지식과 역량에 한계를 느끼게 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귀한 마음이 담긴 후원금으로 시작한 프로젝트이기에 약속했던 결과물을 못 만들 거라면 최대한 빨리 돌아와서 후원금을 되돌려주는 게 옳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동남부 아프리카-손휘주의 지리 포토 에세이》는 결국 2018년 4월에 출간됐다. 세 번의 동남부 아프리카 답사를 통해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를 지리학도의 입장에서 간략하게 정리한 책이다. 휘주 씨는 “이 책은 크라우드펀딩과 개인 SNS를 통해 자신의 아프리카 유랑을 응원해준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동시에 스스로 반성하는 마음으로 쓴 것”이라고 말한다.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할 당시 구상했던 양질의 지리 정보나 깊이 있는 지리적인 시선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리정보가 많이 담겨있다는 평이 있는 이유는 양질의 지리 정보와 깊이 있는 시선을 향해 나아가고자 했던 제 자신의 의지가 책에 담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진로 찾기, 좋은 대학 간다고 해결 안 돼…자기 자신을 알아야
지리학도로서 아직 배움의 길 위에 있는 휘주 씨는 여전히 자신의 도전이 ‘미완성’ 또는 ‘현재진행형’이라고 말한다. 스물여덟 살, 한국사회에서는 취업이라는 과제를 앞둔 나이이지만 휘주 씨는 아직 진로에 대해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고 말한다.
“대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구체적인 직업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던 적은 없습니다. 여행을 떠나거나 무언가를 하고 싶었던 것이 많은 학생이었지, 어떤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제가 이렇게 얘기를 하면 사람들은 적잖이 놀랍니다. 수년에 걸쳐 아프리카를 답사하고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 마치 뚜렷한 목표 의식을 가지고 아프리카 지역전문가를 꿈꾸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요. 아프리카 답사 외에도 기자단 활동, 봉사활동, 공모전 등의 대외활동도 많이 한 편이라 친한 친구들조차 제가 대기업에 가려고 한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대기업 취업이나 아프리카 전문가 같은 목표도 없이 그 길을 걸었던 이유는 오로지 지리학도로서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으면서 하고 싶은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휘주 씨는 답사를 떠나고 사진, 영상, 글과 같은 콘텐츠를 통해 더 푸른 지구와 아름다운 세상에 기여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이미 그 꿈을 이룬 것과 같아 행복하다고 전한다.
물론 아프리카 또는 세계 다른 지역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해외영업이나 해외마케팅은 물론 개발협력이나 지역연구를 하는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입시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한국의 청소년들에게 휘주 씨는 대학입시 이후의 자신의 삶을 내다보라고 조언한다.
“저는 중고등학생 때부터 안전한 길을 걸어가는 학생이었습니다. 소위 서울에 있는 대학교를 가기 위해 수능을 공부했던 아주 평범한 학생이었지요. 그때도 꿈이 분명히 정해져 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좋은 대학교에 가면 모든 게 해결되는 것처럼 보여서 그랬을 뿐이지요. 다들 그렇게 말하니까요.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원하던 대학교에 간다고 인생이 풀리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대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부터가 정말 자신을 알아가고 길을 찾아가는 시작점인 것 같아요. 그때부터 봉사, 여행, 아르바이트 등 다양한 일을 해볼 수 있으니까요.”
진로를 계획할 때도 인터넷에 떠도는 높은 연봉의 직업 순위를 찾는 것보다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거나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 더 좋은 방법임을 강조했다.
“중요한 건 자신이 한국에서 몇 번째로 공부를 잘하느냐가 아닙니다. 사람의 인생이 공부로 순위가 매겨지는 것이 아니거든요. 더 중요한 건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또는 얼마나 가치있는 일을 하는지를 자신이 직접 판단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변의 어른들을 한 번 둘러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어떤 직업을 선택한 선배가 웃으면서 일하는지, 어떻게 살아가는 가족이 화목한지, 어떤 길을 걷는 사람이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사는지를.”
*크라우드펀딩(crowdfunding):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이용해 소규모 후원을 받거나 투자 등의 목적으로 인터넷과 같은 플랫폼을 통해 다수의 개인들로부터 자금을 모으는 행위이다.
[글쓴이] 김은혜 에디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