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로정보 | [명사인터뷰] “엉뚱하더라도 몰입된다면 일단 저질러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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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19-07-11 16:00 조회1,713회 댓글0건본문
수줍고 내성적이며, 존재감 없던 청년은 두 가지 사건을 겪으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첫 번째 사건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찾아왔다.
“폐결핵을 앓았어요. 학교에 석 달 정도 못 나갔죠. 학교를 다닐 때도 피를 토하면서 다녔어요. 한 학기를 쉬어야 하나 생각했는데 실행으로 옮기지는 못 했어요. 결핵을 앓기 전의 저는 평범한 아이였어요. 성적도 중간, 도드라진 것 없이 무난한 학생이었죠. 선생님이 이름만 불러도 가슴이 콩닥거리는 수줍음 많고 내성적인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결핵 때문에 여름 내내 누워 지내면서 절박한 마음이 생겼어요. ‘이렇게 인생이 끝날 수도 있겠구나’, ‘그냥 이대로 무너질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들요. 다행히 어느 정도 건강이 회복되면서 불굴의 정신력이 발휘됐던 것 같아요. 성적이 수직 상승했죠. 본능적으로 무너지지 않으려면 몰입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던 시기 같아요.”
국방부를 벌벌 떨게 만드는 군사전문가이자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이 된 정의당 김종대 의원(국방위·51)의 학창 시절 얘기다. 고교 성적의 수직 상승으로 원하는 대학과 학과를 선택할 수 있게 된 김종대 학생은 전공으로 경제학을 선택했다.
“제 인생에 동기를 부여받을 수 있는 촉망받는 분야가 경제학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예상과 달리 몰입이 잘 안 됐어요. 당시 연세대 커리큘럼은 주로 숫자로 분석, 예측하는 수업이 많았는데 대기업 실무자로 진로가 결정된 느낌을 받았어요. 돌이켜보면 당시에 저는 정치, 경제, 역사 등 인문학적인 호기심이 많았는데 그런 것들이 충족이 잘 안된 거죠. 학문보다는 기업 경영의 실무 수준에 맞춘 표준화 프로그램이었던 것 같아요.”
모두가 선망하는 대학의 선망하는 학과였지만 김종대 청년은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뜻밖에 군대에서 두 번째 몰입의 기회가 왔다.
“제가 대학 2학년을 마치고 1986년에 육군 보병으로 군대를 갔는데, 당시는 많이 어수선할 때였어요. 대학생들이 데모를 많이 했고 87년 6월 민주항쟁 직전이었죠. 아시다시피 당시 군은 평화, 인권, 민주주의 이런 것들과는 거리가 멀었죠. 군대에서 총선과 대선을 치렀는데 심적 고통이 컸어요. 그런데 그 때 뜻밖에 몰입의 경험을 다시 했어요. 고등학교 때 폐결핵에 걸렸을 때와 비슷하게 위기상황이 저를 바꾼 거죠. 어떻게 군이라는 조직은 소수의 인력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과 행동을 일사분란하게 통제할 수 있을까? 호기심이 한 번 발동하니까 지옥 같은 시간 속에서도 의미부여가 됐습니다.”
김 의원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 사례를 들었다. 빅터 프랭클이 겪은 바에 따르면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육체적으로 젊고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늙고 병들어도 신념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종교가 됐든, 사상이 됐든 신념이 뚜렷한 사람들이 생존 경쟁력이 높았다는 것. 이를 정신과 치료에 활용했는데, 이른바 ‘로코 테라피(의미치료)’라는 치료법이다. 예를 들어 자살을 원하는 사람에게 ‘왜 자살하지 않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면 이런저런 이유를 대기 마련인데 바로 그 ‘이런저런’ 이유가 당신이 살아야 할 이유이자 신념이라는 것이다.
“군대에 있으면서 저에게도 ‘로코 테라피’ 과정이 있었던 것 같아요. 세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틀(창)을 군대에서 발견한 거죠. 곤혹스러웠지만 특이했던 경험이 저를 바꿔놓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청소년들에게 얘기하고 싶어요. 엉뚱한 일이더라도 주저하지 말고 일단 저지르고 보라고요.”
육군 병장 제대 후 청년 김종대는 경제학 수업은 뒷전에 두고, 군사문제연구 동아리를 만들었다. 군사관련 세미나를 찾아가고, 군사전문가를 만나러 다녔다. 대학 졸업 무렵에는 ‘목숨 걸고’ 야당에 입당한 고위 장성 출신 의원의 기사를 보고 무작정 찾아가 같이 일하고 싶다고 얘기했다. 국회 보좌관 직무의 시작이었다.
하고 싶었던 일에 뛰어드니 적응이 빨랐고 실적도 좋았다. 때마침 율곡비리, 하나회 숙군, 한국형 전투기사업 비리 등 굵직굵직한 국방 이슈들이 쉴 틈 없이 터졌다. 김 보좌관은 자료와 정보의 바다에 빠져 올곧이 업무에 헌신했다. 그 결과 5년 만에 군사평론가라는 타이틀이 따라왔다.
국회에서 전문성을 기르다보니 정책의 정점(청와대)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그 꿈은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 이뤄졌다. 군에서는 김종대 대책반이 별도로 꾸려질 정도로 긴장했다. 총리실과 국방부를 거쳐 공직생활을 정리한 뒤에는 군사 전문 월간지를 창간했다. 군사 관련 전문성을 계속 유지하려면 언론사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 방향이 정해지자 자금은 문제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겁도 없이 언론사를 만들었다며 금방 망할 거라고 비웃었다. 아니나 다를까 창간 3개월 만에 퇴직금이 고갈됐다. 하지만 김종대 발행인 겸 편집인은 연구용역, 출간 인세, 칼럼 기고, 강연 등 닥치는 대로 생업에 나서 월간지의 생존을 관철시켰다. 4개 매체에 칼럼을 연재할 때는 사람인지 글쓰는 기계인지 헷갈릴 정도로 써댔지만 쓰는 만큼 논리와 전문성은 깊어갔다. 군사 관련 정보와 전문성에서 멀어지지 않겠다는 목표에서도 이탈하지 않았다. 청년 시절 김 의원은 꿈트리가 응원해마지 않는 ‘자기주도진로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제 앞에는 길이 있지 않았어요. 없는 길을 만들면서 갔죠. 군사전문가가 되려면 군인이거나 관련 석·박사 학위가 있어야 하는데 저는 없었거든요. 이도저도 아니었죠. 멘토도 없고 교과서도 없었어요. 대신 제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뚜렷이 알았어요. 이것만큼은 해보고 싶다는 게 분명히 있었던 거죠. 청소년들은 자신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뚜렷하게 설명하기 힘들 수도 있어요. 하지만 스스로는 느낌으로 알죠. 그런 느낌만 있어도 갈 수 있어요.”
이른바 명문대 좋은 학과를 들어가서 (당시로서는) 비전 없는 길을 걷고 있는 아들을 바라보는 부모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돌이켜보면 저는 항상 부모님이 원하시는 것과 반대의 길로만 간 것 같아요. 칭찬을 들어본 적이 거의 없어요.(웃음) 부모님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로부터도 마찬가지였어요. 사람들은 제가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할 때도, 잡지를 창간했을 때도, 정의당에 입당했을 때도 비웃었어요. 하지만 그런 반대와 비웃음을 뛰어넘어야 해요. 자존감이 강한 사람은 그런 과정을 반드시 겪게 돼 있습니다. 셰익스피어가 얘기했죠. 모든 아버지는 죽어야 한다고. 그래야 아들의 시대가 열린다는 의미에서 한 말입니다. 자녀는 부모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런데 뛰어넘으려면 일탈과 독립의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어려움을 겪는 한이 있더라도 외부의 간섭을 거부하고 강한 정신력을 발휘해야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습니다.”
김 의원은 그러면서 ‘나만의 길’을 걷는 노하우를 살짝 알려줬다.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뚜렷하다면 그걸 함부로 다른 사람들에게 발설하지 마세요. 주변 사람들에게 값싸게 의논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원하는 바가 이뤄진다는 전제 하에 그냥 계획을 짜면 됩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면 되죠. 예를 들어 기타리스트가 되고 싶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기타리스트가 어떤지 물어볼 필요가 없어요. 그냥 일단 기타부터 사고 보는 겁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꿈을 의존하고 기대기 시작하면 그 꿈은 초라해지기 쉽습니다. 그럴 땐 진짜 비웃음의 대상이 될 수도 있어요.”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답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하지만 사람들마다 분명히 특징이 있습니다. 마음이 끌리는 곳으로 가다 보면 분명히 축적되는 게 있을 겁니다. 그 축적된 것을 기반으로 해서 저지르면 됩니다. 예를 들어 자녀에게 200만원으로 한 달 간 해외여행을 기획해 보라고 하면 선뜻 해내는 친구들이 많지 않을 거예요. 아이들에게 시간과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죠. 모 정신분석학자가 분석하기를 우리나라 자녀들은 평균 6분에 한 번씩 부모로부터 통제를 받는다고 해요. 6분마다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잔소리를 듣고 산다는 거죠.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는 시간과 권한이 주어지지 않으니 저지르기도 힘든 겁니다. 노예화된 인간에게 가장 큰 형벌은 자유를 주는 것이라고 하죠. 노예에게 자유는 크나큰 형벌입니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이와 비슷한 처지예요. 자원과 시간, 권한과 기회를 평소에 많이 줘야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김 의원은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교육현장이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가 아니라 경쟁해서 남을 이겨야만 하는 적자생존의 공간이 됐어요. 그러니 인성이 나빠지고 자기중심적으로 성장하게 됐습니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가고 있어요. 치열한 경쟁에서 이기려고 과로가 일상화돼 있는데 거의 학대 수준이에요. 스웨덴에서는 부모가 자녀에게 예습을 시키면 학교에서 곧바로 항의가 들어옵니다. 모르는 걸 같이 배워가는 기쁨을 빼앗는 것은 공동체를 저해하는 행위라면서 말이죠. 성적이 나쁘면 따로 보충학습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개인별 특성화 교육은 자율활동을 통해 키울 수 있도록 합니다. 스웨덴에서는 더불어 살아가는 법과 개인의 적성을 찾아가는 활동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죠.”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자유학기제가 전면시행되면서 변화의 조짐이 있다고 전하니 반색했다.
“자유학기제라는 쉼표를 통해 성찰을 하고 열정을 고취시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요. 나를 발견하는 기회를 제도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감수성이 예민한 시점에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앞으로는 스스로 성장, 발전하고 강한 자존감이 있는 사람만이 미래가 보장될 겁니다. 오토바이가 됐든, 게임이 됐든 스스로 주도하며 몰입하는 경험을 많이 해봤으면 좋겠어요.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행위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권장해야죠. 청소년기에는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도록 생각하는 시간이 주어져야 합니다.”
◆김종대 의원은… 1966년생. 연세대학교 졸업. 대한민국의 군사평론가이자 정치인이다. 월간 군사전문지 <디펜스21+>의 편집장을 역임했고 김영삼 정부,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에서 국방 관련 행정 경험을 쌓은 바 있다. 2015년 8월 정의당에 입당해 같은 해 10월에 같은 당 국방개혁기획단장이 되었다.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의당 비례대표 후보로 당선됐다. 저서로는 《노무현, 시대의 문턱을 넘다》,《서해전쟁》,《시크릿 파일 위기의 장군들》,《안보 전쟁》등이 있다.
[글쓴이] 최중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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